순교자료4 3 페이지 | 예수사랑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bg

순교자료4

본문

전주, 숨겨진 순교사화

순교의 뒤안길
국토기행을 하면서 매번 찡하게 느끼는 것은 기독교 수용사 (受容史)의 구석구석에 진하게 숨겨진 순교와 그 순교로 말미암아 스며든 피에 대한 애절함이다. 애오라지 주님만을 위해 낯설고 물설고 말까지 설은 이국땅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을 받아가며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몰려드는 사람들과 박장대소를 하며 따라서 흉내를 내기도 할 청중들. 대꼬챙이처럼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유생(儒生)들, 거리에 나다니면 졸졸 따라다니면서 야유하고 돌맹이질 하고 모래를 뿌려대는 어린 아이들을 향하여 통하지 않는 말로 띄엄띄엄 전도를 했을 그네들의 모습이 선하게 살아온다. 그러나 그런 야유와 조롱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고 또 면역이 되어있어 견딜만하다고 치자.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첫돌도 안된 자녀를 전염병으로 잃어버리거나 사랑하는 아내와 동고동락하던 동역자들이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나 그 뼈를 이국땅에 직접 묻어가야 했던 그들의 승화된 절망은 늘 순교의 뒤안길에서만 다소곳이 기록될 뿐이었다.
외국 선교사들이야 이만한 각오쯤은 하고 선교 현장에 뛰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내 순교자들이 뿌린 피에 대한 추념과 이에 뿌리를 둔 한국교회의 자리매김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번에 찾은 고도 (古都) 전주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내려주는 곳이라 해도 좋을 듯했다.

호남선교의 뿌리
먼저 호남선교의 뿌리가 되는 전주의 기독교 수용과정을 살펴보면서 앞서 제기한 문제의 해답을 귀납적으로 추론해 보고자 한다. 1981년 10월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열린 미국신학생연합 외국전도회 (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 참석한 두 신학생 (Lewis Boyd Tate―최의덕. William Davis Reynolds―리눌서)의 마음은 동방의 조그만 “은자의 나라 (Hermit Nation)" 로 꽉 차있었다.
이미 자기가 다니는 맥코믹 신학교에서 언더우드로부터 한국선교 현황을 들은 바있는 최의덕은 이 집회에서. 당시 진보주의자로서 밴더빌트대학에 유학 중이던 윤치호로부터 한국에 대한 강연을 듣고 유니온신학교 학생 죤슨 (Cameron Johnson)과 앞서 말한 리눌서와 함께 한국선교를 결행하게 된다.
죤슨은 내쉬빌대회 이후 한국 소개 문헌을 찾던 중 아저씨 댁에서 한국역사에 관한 희귀본을 발견하여 동료 신학생 정킨(William Mcery Junckin―전위렴)과 함께 읽던 중 그도 한국선교에 몸 바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원래 이들은 중국선교에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내쉬빌대회를 통해 마음을 바꾼 것이다.
드디어 세 친구인 리눌서. 죤슨. 전위렴은 남장로교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에 한국선교를 정식 신청한다. 실행위원회는 젊은 지원자들의 요구에 응하기로 하고 최의덕. 리눌서. 전위렴을 초대 선교사로 선정하였다. 이들의 동료 전위렴은 선발대보다 한달 먼저 서울에 와서 얼마간 머물다가 귀국한 뒤에도 한국선교를 위해 저술 활동을 하는 등 동료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최초의 3인 선교사가 정해진 뒤 선교에 관심을 갖고있던 4명의 여성이 이들과 함께하여 한국으로 건너왔다. 즉 최의덕 목사의 여동생 매티테이트 (Mattie Tate―최마태),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전위렴의 부인 리번 (Mary Leyburn Junckin), 리눌서의 부인 볼링 (Patsy Bolling Reynolds)이 그들인데. 이들을 7인의 선발대. 라고도 한다.
1893년 2월. 호남 지방을 선교구역으로 할당받은 지 1개월 후 남장로교 선교회는 리눌서 선교사의 비서인 정해원을 급히 전주에 보내어 선교사들을 위한 대지를 구입하게 한다. 그해 9월. 최의덕과 전위렴 선교사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전주에 와서 2주일간 머물기도 한다.
전주에 도착해 보니 정해원은 전주성문 밖 언덕 은송리에 아담한 초가 한채를 26달러에 구입해 놓았는데. 성밖에 구입한 것은 외국인들의 성내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교통수단은 말과 가마에 불과했으므로 서울에서 전주까지는 6일이나 소요되는 지루한 여정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전주에 도착하여 은송리 초가에 머무르면서 서서히 선교활동을 펴나갔다. 척외사상 (斥外思想)에 젖어있던 보수층 사람들은 몽둥이를 갖고와 특히 최의덕 선교사 남매가 거주하는 집 대문을 부수며. “이집을 불사르고 외국놈을 쫓아내자”고 하면서 위협을 가하기도 했으나 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마태 양은 전주에 거주하게 된 최초의 서양 여인이었던만큼 많은 한국 여인들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 덕분에 구태여 성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매일 400-500명의 여인들이 구경하러 몰려들었기 때문에 집에서 그들과 접촉하여 전도도 할 수 있었다.
후에 하위렴 (William Harrison) 선교사도 동참하여 마침내 1897년 7월 17일에는 전주 토착교회 (土着敎會)의 시작을 알리는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이 세례식은 리눌서 선교사가 설교와 예식을 집행하였다. 세례 지원자 6명 중 한 사람은 무단불참했으며. 김창국과 김내윤. 부인 3명이 전주 최초로 세례교인이 되었다. 이 세례식을 계기로 전주에는 복음의 뿌리가 내렸다. 얼마 후에는 최 선교사의 사랑채를 개조하여 예배당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예배당이 바로 오늘날 서문교회의 출발점이 된다.
이 예배당은 남녀반을 엄격히 구분했는데. 중앙에는 커튼을 쳐서 양쪽을 바라볼 수 없도록 하고. 단지 예배인도자만이 양쪽을 바라보며 설교할 수 있도록 'ㄱ'자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예배당이 마련된 후에야 비로소 주일 낮예배 때에 헌금순서가 있게 되었고. 헌금관리를 위해 회계를 선출했다. 하지만 교회의 성장 속도는 지극히 완만하여 1898년에는 불과 2명. 1899년에는 1명이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다.

의료선교로 개화의 물결이
전주의 의료선교는 하위렴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선교를 준비할 적에 신학은 물론 의학훈련까지 겸하여 받았기 때문에 전주에 오자마자 환자들을 진찰하였다. 최초의 세례자 김창국의 아버지도 그에게 치료를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서문 밖에 약방을 건축하고 중하지 않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어 인심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전도하는데 여러가지로 유익하였다. 오늘날 예수병원의 전신이 되는 건물은 그의 노력으로 건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의료선교와 복음선교를 동시에 수행하기란 일종의 무리였으므로 결국 데이비스 양과의 결혼을 전후하여 의료선교는 포기하고 복음선교에만 주력하였다.
바로 이 무렵 전주 의료선교의 공로자 잉골드 (Mattie B.Ingold) 도착했다. 그녀는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은송리 작은 초가에 여성진료소를 개설했는데. 이는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진료가 시작된지 4개월 만에 400여 환자들이 몰려왔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잉골드의 진정한 관심은 선진 의학으로 환자들을 잘 치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매개로 하여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었다. 그녀의 복음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녀가 저 유명한 유아요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여 출판했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잉골드의 열렬한 의료선교 활동은 1905년 최의덕 선교사와의 결혼을 계기로 중단되고 만다. 그러나 그녀의 의료활동은 전주에 개화의 정신을 불어넣고 아울러 기독교 선교를 위한 여건조성을 해준 데에 큰 의의를 남긴다.

“믿음으로써 말하노니”
전주에서 복음이 점차 깊은 뿌리를 내려갈 즈음. 1898년 하위렴 선교사와 결혼한 이래 줄곧 전주에서 활동하던 데이비스 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선교 소명이 불신 아동들과 여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위해 늘 힘쓰던 어느날 병든 여인을 문병갔다가 그 열병에 감염되었던 것이다. 병명은 발진티푸스라 했다.
이어 우리는 고귀한 순교의 삶을 살았던 데이비스를 비롯한 전주 최초의 선교사들이 묻힌 완산―그 당시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서문 밖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예수병원. 기전학교. 신흥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는―으로 갔다.
양화진의 축소판같은 인상을 주는 이곳의 입구를 들어서자 왼쪽 끝부터 리네 데이빗. 전위렴. 데이빗 랜킨.등이 차례로 누워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전위렴 선교사의 묘소 앞에 아주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세 자녀의 무덤이 풍상에 깎여진 비문 아래 놓여있어 애처로움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바람에 파헤쳐진 채 돌보지 않은 묘소도 두기 基 되었다.
“뎌가 죽엇스나 그 밋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는 랜킴 (Nellie B. Rankim)의 비문 앞에 서니 더욱 숙연해졌다.
이들 선교사들이 완산 얄일대에서 펼친 선교 사역의 실체는 아무래도 서문교회에서 찾아야 할 것같았다. 완산 밑 초가 한채에서 출발하여 오늘날까지 13개 교회의 모체가 된 서문교회는 건축양식도 특이했을 뿐만 아니라 모 (母) 교회로서의 위용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지금 서문교회에 남아있는 선교사의 체취는 특히 종각에 남아있었다. 한일합방 한해 전위렴 선교사가 미국에서 가져오면서 전주시내에 복음의 종소리를 울려퍼지게 했던 그때 그 흔적.
“그때 그 종은 달구지에 싣고 올 만큼 큰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정 말기 놋그릇 숟가락까지도 거둬가던 일본 사람들 눈에 큼직한 종은 굴려들어온 호박처럼 보였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있는 저 종은 그때 그 종이 아니고 그후에 들여온 것입니다. 저 종각만이 그때 그 모습을 하고 있지요.” 태어나면서부터 장로로 시무하여 오늘날까지 서문교회를 떠나지 않은 김대전 장로가 안내하며 들려준 말이다.

가톨릭의 피눈물 사화 (史話)
가톨릭의 피눈물 저린 순교사화 역시 개신교에 못지않을 만큼 처참하다. 우리나라에서 가톨릭이 싹틀 무렵 가장 큰 걸림돌은 조상에 대한 제사가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양반 신도들의 배교가 늘고있는 가운데. 진산 (珍山)의 양반 신도 윤지충이 어머니 초상을 당하자 외사촌 권상연과 의논하여 이 교리에 따라 어머니 신주 (神主)를 불태워버리자 격분한 유생들이 정조에게 상소를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33세 된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로 압령되어 숲정이 8疸 사형장에서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그 당시 가톨릭을 믿었던 큰 죄인은 숲정이에서. 작은 죄인은 남문 밖에서 생을 마쳤다. 지금의 전동성당 자리와 초록바위 밑에와 전 대동성당 자리 등이 바로 순교의 피가 뿌려진 현장들이다. 이때부터 전주와 가톨릭은 불가분에 관계가 된다.
이들의 처형은 달레의 조선천주교의 확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목판에 죄목을 적은 결안 (結案)을 읽게 한 다음 커다란 통나무 참수대 (斬首臺)에 목을 얹게 했다. 참수된 목은 9일 동안 형장 부근 성문 가까이에 높이 매달렸다가 장사 지내게 된다.
그런데 그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동지섣달 엄동설한인데도 바로 당일 참수 당한 것처럼 피가 얼지도 않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손수건에 그 피를 적셔 순교 기록과 더불어 북경 구베어 주교에게 보냈다. 비신도들도 이 기적의 피를 수건에 적셔 갔으며. 성벽이나 결안에 튀긴 피를 씻어갔다. 그리고 죽어가는 불치의 병자에게 그 피를 만지게 하여 되살려냈다고도 한다.
풍남문 밖에서 참수 당한 이들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성당이 바로 프랑스 드망즈 주교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격찬한 전동성당이다.
국가지정기념물 288호인 전동성당은 1914년 건립돼 명동성당. 대구 계산동성당 다음으로 국내에서 세번째로 오래됐고. 호남지방에서는 최고령의 신식건물이다. 고딕식인 다른 성당과 달리 삼량 (三粱)식 평면구성에 종탑부와 석조기 등은 비잔틴.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이 절충돼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8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벽돌이 부식되고 6.25 때 내부 일부가 파손된데다. 작년 10월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천장 20여평이 불에 타 비가 새고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 성당의 주춧돌이 바로 윤지충. 권상연 같은 분들의 참수된 머리가 일주일 동안 매달려 있던 풍남문을 옮길 때 성곽앞 피묻은 바로 그 돌입니다. 성당 안에 있는 팔각 기둥 스무개는 익산 군황면 등의 화강암을 썼습니다”라면서 안내해 준 한 신도는 모퉁잇돌의 의미를 드려주었다.
우리는 다시 가톨릭을 믿는 큰 죄인을 처형시킨 해성고등학교 안에 있는 숲정이로 갔다. 이곳은 특히 병인년에 조화서. 이명서. 정문천. 손원지. 한원서. 정원지. 조윤호 등 7명이 바로 이 자리에서 순교한 뜻을 기리며 전주교구에서 존경과 감사의 뜻을 새긴 그날 오늘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주의 만만찮은 저력
신구교를 합하여 참으로 아름답게 기록될 전주기독교 순교사화의 결실이 크고 작은 교회들을 통하여 주저리 주저리 맺어지고 있는 가운데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현장이 있었다. 백년 전 복음수입처 의 면모와는 정반대의 복음수출처로 탈바꿈하려고 애쓰는 안디옥교회가 바로 그곳.
콘센트를 엮어 세운 이 교회가 천하보다 귀한 영혼구원을 위해 1년에 쓰는 해외선교 비용은 자그만치 한달에 1,200만원(교회 전체 예산의 70%)이다. 현대 교회에 스며들만한 일체의 세속화 현상을 거부하면서 선교제일주의로만 향하는 이런 교회가 전주의 한모퉁이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또한 전주의 만만찮은 저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안디옥교회가 모든 면에서 현대 교회의 완전한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전주 순교사화의 뜻과 정신에 가장 근접한 교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자료출처: http://www.tmag.co.kr/moksin/index/89_11/current/songkitae.htm

상단으로 가운데로 하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