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료2 5 페이지 | 예수사랑
PROPILE
소개의 글
인생의 의미
영상 메시지
생명의 길
사영리
Four Spiritual Laws
하나님과의 대화
영상선교
믿음과 구원
창조·죄·심판
구원의 복음
선교자료 공유
순교기념관
순교증언 및 기록
순교자료2
순교자료3
순교자료4
순교자료 공유
선교포럼
찬양 자료실
선교 자료실
설교와 간증
천국지옥 간증
지구촌 강단
선교카페
창조와 섭리
마라나타
믿음글 은혜글
은혜영상
자유게시판
사이트 링크
사이트 링크
닫기 ×
로그인
회원가입
PROPILE
소개의 글
인생의 의미
영상 메시지
생명의 길
사영리
Four Spiritual Laws
하나님과의 대화
영상선교
믿음과 구원
창조·죄·심판
구원의 복음
선교자료 공유
순교기념관
순교증언 및 기록
순교자료2
순교자료3
순교자료4
순교자료 공유
선교포럼
찬양 자료실
선교 자료실
설교와 간증
천국지옥 간증
지구촌 강단
선교카페
창조와 섭리
마라나타
믿음글 은혜글
은혜영상
자유게시판
사이트 링크
사이트 링크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3)
bg
PROPILE
소개의 글
인생의 의미
영상 메시지
생명의 길
사영리
Four Spiritual Laws
하나님과의 대화
영상선교
믿음과 구원
창조·죄·심판
구원의 복음
선교자료 공유
순교기념관
순교증언 및 기록
순교자료2
순교자료3
순교자료4
순교자료 공유
선교포럼
찬양 자료실
선교 자료실
설교와 간증
천국지옥 간증
지구촌 강단
선교카페
창조와 섭리
마라나타
믿음글 은혜글
은혜영상
자유게시판
사이트 링크
사이트 링크
성경검색
성경전체검색
구약
신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검색
성경보기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장
번역
개역개정
개역한글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NIV
KJV
NASB
新改譯
口語譯
대역
개역개정
개역한글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NIV
KJV
NASB
新改譯
口語譯
없음
보기
FGTV
CGNTV
순교자료2
>
>
순교자료2
순교자료2 카테고리
최초의 순교자
화형당한 순교자 폴리갑
12명의 순교자
66인의 순교자
장방산의 노목사
본문
장방산의 노목사
한 줌 흙을 퍼 옮겨놓으면 아마 그런 모습일 것이다. 철원평야 한가운데서 長防山은 화선지에 찍힌 획 하나처럼 작고 보잘 것 없었다. 온통 낙엽송 밭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그늘 속에 마을이 소복히 앉아있었다. 마을의 돌담들은 나이가 든듯했다. 한탄강이나 대교천 강돌들일텐데 덕지덕지 세월의 때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장흥교회도 돌집이었다.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곰보둘들이었다. 철원 제일교회의 무너진 벽채와 돌계단에서 보았던 바로 그 현무암들이었다. 넌즈시 한 시대를 공유했던 두 교회의 아픔을 암시하고 있었다. 17평 벽돌집을 이어붙였지만 뒷채 곰보돌 벽엔 여전히 잔인한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독교 감리교단의 첫 반공 희생 사건이자 장흥교회가 연루된 첫 순교 사건은 48년 8월에 일어났다. 이시영 부통령은 멀지않아 38선이 헐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극비리에 ‘38선이북관리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통령은 김윤옥목사(당시 34세)를 불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상임이사를 지낸 김병조 목사(1876∼1947)의 아들. 김목사는 38선 이북 강원도 반공책임자가 되어 38선을 넘어 철원 제일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젊은 부목사는 장흥교회를 주목했다. 이 교회는 1920년 장방산마을 고봉기씨집에서 창립한 철원교회의 자교회.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이었던 신석구 목사를 비롯해 명관조 박경룡 목사등이 담임하면서 민족교육이 단단히 착근한 교회였다. 이 교회 청년 30명을 모아 ‘신한애국청년회’를 결성했다. 46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그해 8월 일망타진됐다. 장흥교회 청년들은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갔다. 그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박성배장로는 8년, 박정배(당시 36세)는 5년, 김정필(당시 37세) 정창화(당시 35세)는 각각 15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모두 옥사했다. 몇사람이 옥고를 치르고 돌아왔으나 이내 그들은 다시 함경고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장흥리 사람들은 시퍼런 한을 장방산에 묻었다.
장방산은 한많은 산이었다. 50년 10월 10일 육군 백골부대가 철원읍에 진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1백5가구중 30가구가 공산당원이었던 장흥리에는 아직도 서슬이 퍼런 그들의 시선이 마을을 감시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장방산에 ‘터졌다 38선. 만나보자 부모형제’란 삐라가 뿌려졌다. 마을 봉기의 예고탄이었다. 마을 청년들은 어느새 토마토 빨갱이 30명을 공회당에 감금해 놓았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저지를 죄과를 벗어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출타중이던 徐琦勳목사(1882∼1951)는 이 소식을 마을 밖에서 들었다. 그는 허겁지겁 마을로 달려왔다. 이미 두 사람이 처형된 뒤였다. “내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徐목사는 준엄하게 청년들을 꾸짖었다. 徐목사는 徐榮九논산군수의 장남이다.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이미 고저 구역장, 철원지방 감리사, 원산 구세병원 원목, 원산 신고산교회 담임 등을 지낸 원로목사. 47년 5월 신한애국청년회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장흥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파송된 그의 권위는 대단했다. “내말을 듣지않으면 내가 마을을 떠나겠다”는 호령에 청년들은 ‘원수’를 풀어줬다. 그러나 徐목사는 바로 그 원수들의 손에 순교했다. 전세가 역전돼 마을은 다시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徐목사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냉정리에서 첫 밤을 보내던 徐목사는 열 집이 마을을 떠나지 못한 사실을 알았다. 그날밤 노목사는 가족을 이끌고 장방산으로 돌아왔다. 열 집의 마을 주민들은 내무서원의 눈길을 피해 아궁이나 돌각더미속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목사가 울리는 새벽종소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밤중 돌담장모퉁이에서 “오늘은 약력으로 섣달 스무사흘,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하루, 30분만 있으면 자정”이라고 날자와 시간을 알려주는 노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있었다. 51년 새해 첫날, 실성한 사람처럼 어두운 마을을 순회하던 노목사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장흥교회는 종이 울리지 않았다.
다시 장방산으로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노목사는 교회에 없었다. 내무서원들은노목사에게 처음 외아들 기택씨(현 인천 영화학교 교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요리의 빈창고로 끌려갔다. 그들은 창고에 훤히 불을 밝혀 놓았다. 등화관제를 하지 않은 건물은 B-29의 좋은 표적이었다. 그들은 목사의 아들을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포탄이 떨어지는 틈을 타 철원을 탈출했다. 그해 12월 13일 몰래 교회를 찾아온 권오창 장로에게 徐목사는‘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죽음이 아니오,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라)란묘한 글귀 하나를 적어줬다. 철원평야는 큰 눈으로 새해를 맞았다. 작은벌 끝 대교천변의 韓집사집에 기거하던 徐목사에게 새해 손님이 찾아왔다. 잘 아는 내무서원이었다. “갑시다.”들판을 가로 질러간 발자국은 세 개였다. 하나는 내무서원의 것이고 하나는 徐모사의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노목사의 길을 마지막까지 동행하던 그의 지팡이 자국이었다. 발자국은 들판을 지나 장방산으로 올랐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발자국은 오래도록 멈춰 서 있었던 것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은 동송 사문안골로 이어졌다. 거긴 지금도 철원사람들이 그곳으로 끌려간 사람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해 ‘死不還’골로 고쳐 부르는 곳이다.
15년 뒤인 67년 마을 사람들은 장흥교회 뜨락에 오석으로 된 비 하나를 세웠다. 작은 비신이었지만 이수와 비좌를 갖춘 정성을 들인 비였다. ‘故 서기훈 목사 순교 기념비’에는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이란 그의 시구가 적혀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요(요:25∼26)’란 성경구절은 마을 사람들이 노목사의 음성인양 가슴에 묻고 싶은 바램같은 것일 것이다.
작은 동산 장방산은 동으로 자릿벌, 서로 달챙이들, 남으로 메닷다니들, 북으로 작은벌 등 온통 철원평야를 거느리며 한탄강과 대교천을 굽어보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둔덕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장방산이라고 멧산자 하나를 더붙인 것은 아마 그 산이 작지만 큰 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료출처:
http://www.dmzline.com/dmz/dmz_sub_03_01.html
처음
1
페이지
2
페이지
3
페이지
4
페이지
열린
5
페이지
PROPILE
이용약관
개인정보 처리방침
enogs@hanmail.net
/
Copyright © www.lovejesus.kr All Right Reserved.
상단으로
가운데로
하단으로
예수사랑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x
PROPILE
소개의 글
인생의 의미
영상 메시지
생명의 길
사영리
Four Spiritual Laws
하나님과의 대화
영상선교
믿음과 구원
창조·죄·심판
구원의 복음
선교자료 공유
순교기념관
순교증언 및 기록
순교자료2
순교자료3
순교자료4
순교자료 공유
선교포럼
찬양 자료실
선교 자료실
설교와 간증
천국지옥 간증
지구촌 강단
선교카페
창조와 섭리
마라나타
믿음글 은혜글
은혜영상
자유게시판
사이트 링크
사이트 링크
성경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