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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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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주일 종은 울리지 않았다' - 12명의 순교자


순교자들은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도 남기지 않았다. 추가령 열곡대의 바이블루트에서는 12명의 기독교 목회자가 순교했지만 그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DMZ 순교사는 '꾸며낸 얘기'란 비아냥이 늘 뒤따르고 있다.

1950년 6월 24일,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북한엔 기독교 목사들에 대한 마지막 일대 검거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위험한 집단이었다. 우선 우익 엘리트들이 다 월남했는 데도 그들은 가지 않았다. 그들은 공산정치를 방해하면서도 주민들의 정신적 지도자 노릇을 하는 자가 많았다. 유사시 그들은 반공전선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었다. 북한은 이 '잠재적 적'을 전쟁을 전개하기 전 대청소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았다. 연천 철원 김화 금성 일대에서 목사, 전도사 장로들이 줄줄이 묶여갔다. 그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이 사건은 38선 이북에서 일어났고, 전쟁은 공교롭게 그 사건 현장에서 끝났다. 그 자리를 밟고 지금 DMZ가 지나가고 있다. 그때 사건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다. 순교 사건은 이렇게 DMZ 속에 묻혀버렸다.

DMZ의 그 사건이 들먹여질 때마다 나는 큰 눈에 우람한 몸집의 노인 한영순씨(韓英珣..철원군 김화읍 학사리)를 생각했다. 노인은 학사 4거리에서 그의 고향 금성가는 길 쪽으로 '한영순 행정서사' 간판을 내고 20년 째 '반 대서소, 반 농사 일'을 하고 있다. DMZ 넘어 금성까지는 50리. 그곳은 그의 할아버지 한사연(韓士淵)목사의 금성교회와 노목사의 순교사가 묻혀있는 곳이다.

한목사는 8.15 해방을 71세에 맞았다. 김화 창도 금성 3교회의 감리사를 맡고 있을 때다. 그가 목회인생을 바쳐 온 장단, 평강, 김화, 삭녕, 김화, 금성, 창도, 회양은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제 때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그는 '짚신을 신고 성경과 찬송가를 등에 진 해괴한 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착의를 달고 요시찰 인물로 지목됐었다. 공산당의 세상이 되자 목사는 다시 '모두 나눠먹기 패'(공산주의)를 거부했다. 이번엔 '이중생활을 하는 자들의 지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목사는 월남하기를 종용하는 사람들에게 "나만 살겠다고 교인을 버릴 순 없다"고 거부했다. 일제 수난기를 살아 온 목사의 교육관은 특이했다. 어느 시대이든 농사꾼과 의사는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뜻대로 맏아들 문옥, 둘째 명옥씨는 농사꾼이 됐다. 그리고 셋째 상옥, 막내 병옥씨는 세브란스를 나와 각각 창도와 통구에서 내과의로 개업해 있었다. 그들도 부친의 뜻에 따라 월남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4일 늦은 밤, 38선을 향해 탱크와 대포를 싣고 부산히 내려가던 금강산 전철의 수송작전은 이미 끝났다. 전쟁 전야의 금성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누군가 금성교회 목사관을 두드렸다. 그는 "회의가 있다"며 잠자리에 든 한목사를 깨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일요일인 이튿날 금성교회의 주일 종은 울리지 않았다.

영순씨는 한목사의 둘째아들인 명옥씨의 아들. 김화고급중학교에 다니던 영순씨는 그해 7월말쯤 전선에 동원되기 위해 김화인민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받아놓고 있었다. 우연히 김화정치보위부 울타리를 지나가다가 할아버지 한목사를 만났다. 우람한 체격의 백발노인은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과 함께 동아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영순아, 네가 증인이다. 증인이 돼야한다!"

한목사의 가계는 철저히 유린됐다. 맏아들은 김화 생창굴 속에서 폭사 당했으며, 의사인 셋째 상옥은 원산으로 끌려갔다. 역시 의사인 막내는 김화 쑥고개 칠성정에서 총살당했다. 해주교회 사모로 시집간 외동딸 만옥은 행방불명됐다. 둘째아들 명옥만 월남했다.

전쟁이 끝난 후 금성이 고향인 사람들의 연말모임에서 영순씨는 할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신시옥(작고)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한목사는 원산 앞바다에서 4명 씩 철사줄에 묶여 수장됐다"고 일러줬다. 신씨는 그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사람이며 그는 그날을 10월 3일로 기억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지난 94년 여름 북한의 오성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구김화읍 읍내리 민통선 북방의 한 벌판에서 들었다. 영순씨는 "여기가 보위부자리, 저기가 내가 막내 작은아버지 시신을 묻어 놓고 표식으로 구두 두 짝을 올려놓았던 그 밭…"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그는 " '네가 증인이 되라'고 한 할아버지의 유언이 가슴에 박힌 커다란 가시 같다"고 말했다. "기막힌 이 사연을 글로 옮길 재주도 없고, 이 사연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도 없다"며 그때 노인은 소년처럼 울었다.

6년이 지난 최근 한영순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더 늙어 70세 노인이 돼 있었다. 2년 전 병을 얻어 민통선 출입영농도 일부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는 내게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나는 한 순교자의 유일한 증인이면서도 그 사실을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 말을 그 때처럼 다시 했다.

그의 가슴엔 아직도 그 가시가 박혀 있었다. 변한 건 어눌해진 말투뿐이었다.

12 순교자 가운데 유일하게 서기훈 목사만 순교비가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장흥교회 뒷뜰에 세워 져 그의 순교사가 전해지고 있다. 장흥교회는 1920년 장방산 아래 설립된 이래 80년 째 그 자리에서 서있다. 그리고 이웃 한탄강 언덕의 대한수도원은 장흥교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낱낱이 지켜봤던 산 증인이다. 그나마 서목사의 순교사가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사연 목사처럼 나머지 11사람은 지금 어느 후손 또는 어느 성도의 가슴에 묻혀 파낼 수 없는 가시가 된 채 DMZ 벌판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바이블루트의 사건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감리교회 서부연회 수난사(윤춘병 저)'. 그러나 이 기록은 빈칸이 너무 많다. 방승학 목사는 그가 시무했던 교회를 밝히지 못했으며 월정교회에 지석교회에 시무하다 피납된 김유해 목사와 월정교회 이운성 전도사는 납치일을, 석왕사교회에서 순교한 김축수 목사는 순교일을 적지 못했다. 유득신 장종식 목사는 시무교회도 납치 또는 순교일을 적지 못했다. 이 기록의 내역란은 더욱 불충분하다. "그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다 순교했느냐?"는 질문에 충분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 기록을 꽤 오래 전에 입수했다. 그리고 원로학자가 못 다 채운 빈칸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누군가 순교자들의 자취를 찾아 DMZ 벌판을 구도자처럼 걷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들이 한 발짝, 한 발짝씩 DMZ에 다가서며 십자가를 세우던 젊은 목회자들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했다. 어떤 이는 "내가 맡은 사명이 아니라"고 끝까지 얘기를 듣지 않았으며, 어떤 이는 "함부로 순교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노인들에겐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한 번 자세히 얘기해 주겠다"고 하던 노장로가 문득 생각 나 그를 찾아갔을 때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또 다른 이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블루트의 그 사건은 이제 더 먼 옛날 얘기가 돼 있었고, 보나마나 "꾸며낸 얘기"라고 비아냥거릴 사람들의 비웃음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도 그 '빈칸'을 채울 그를 아직 나는 만나지 못했다.

자료출처: http://www.dmzline.com/dmz/dmz_sub_12_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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